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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의 명가 라미레즈
최동수  (Homepage) 2014-10-06 10:20:27, 조회 : 4,098, 추천 : 692

그동안 가칭 "기타이야기" 원고를 쓰노라 글 올리기를 자제하였는데
아래 글은 '맛보기 글'입니다.

-----------------  아                            래 -------------------

기타제작에 관한한 스페인의 전통적인 명가인 Ramirez가를 빼놓을 수 없다.
호세 라미레즈가에 관해 알려면 스페인 기타 제작사를 둘러보게 되고 그러자면 역사라기보다는 세계적인 시대의 변천상을 이해하는 길이 첩경이다.


3-1. 기타와 세계의 변천사 :

□ 무적함대의 패퇴 (1588년) :
신대륙 발견 이래 스페인은 중남미와 동남아에 걸친 광대한 식민지를 소유하게 된다.
식민지로부터 들여오는 금은보화 덕분에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되어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소말리아처럼 신사의 나라인 영국 해적의 출몰이 극심한데다, 영국 정부는 이를 방조하는 입장에 있었다.
수차의 경고에도 해적의 소탕은커녕 날로 번성하자, 마침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동맹군이 영국을 정복하고자 출병하기에 이른다.
무적함대라 일컫는 127척의 함대가 출범하였으나 해전에서 기습을 당해 패퇴하고 만다.
결과, 영국과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네델란드가 해상권을 장악하게 되고 스페인의 쇠퇴기가 시작된다.

□ 산업혁명 (18세기 중반 이후) :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기술상의 혁신은 이후 2세기에 걸쳐 유럽을 위시한 전 세계로 확산되어 산업화시대로 돌입한다. 그동안 식민지에서의 수탈로 번영을 누리던 스페인은 산업혁명에의 관심을 게을리 한 탓에 근대 공업의 발전이 늦어지고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한다.

□ 아르헨티나의 독립 (1810) :
아르헨티나의 독립선언에 이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다.

□ 마드리드의 국민반란 (1808∼1814) :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정벌군이 퇴각하자, 이베리아반도의 지배에 저항하여 반도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 Francisco Gonzalez(1818 〜1880) :
1845〜1880까지 그라나다의 같은 공방거리에서 토레스보다 7년이나 먼저 기타를 제작하였고, 호세 라미레즈 1세가 그에게 사사하였다.

◈ Antonio De Torres(1817〜1892) :
생업이 목수였던 토레스는 1852년부터 기타를 제작하였으나, 1869년경에 중단하고 도자기 가게를 운영함.
제작중단 직전에 Julian Arcas의 소개로 Tarrega가 방문하여 기타를 구입하다.
1875년부터 기타제작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 Benito Ferrer(1845∼1925) : 세고비아가 공식 등단하기 전에 사용하던 악기이다.
스승인 Jose Ortega와 함께 그라나다 기타제작학교를 창설했다.

◈ Jose Ramirez 1세(1858∼1923) :
Francisco Gonzalez로부터 기타제작을 배운 유일한 제자로 알려짐.
그는 기타제작의 Maestro로 명성을 날리며 라미레스왕국의 초석을 굳건히 한다.

◈ Manuel Ramirez(1864∼1916) :
호세 라미레즈1세의 여섯살 아래 동생으로 라미레즈의 기타학교에서 기타 제작을 배움.
1891년경에 빠리로 진출코자 하여 형이 큰 자금을 지원해주었으나, 프랑스의 내란으로 포기하고 마드리드에서 독립하자 라미레즈1세와의 관계가 소원해진다.
제1차세계대전 말기에 전 유럽을 휩쓴 독감으로 인해 후사도 없이 사망한다.
마뉴엘이야말로 토레스 다음으로 천재끼 있는 명장의 잠재력이 있었으나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서 아쉽게 여겨진다.

◈ Santos Hernandez(1874∼1943) :
Manueal Ramirez공방에서 가장 우수한 작업반장으로 세고비아가 연주한 악기를 만들었다.
마뉴엘 사후 3년간 마뉴엘 부인 공방에서 제작을 계속하다가 미국으로 이주하다.
같은 시기에 많은 기타 제작가들도 스페인어권의 중남미로 이주하였다고 전해진다.

□ 스페인 전쟁(1898) :
쿠바가 스페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스페인이 무력으로 평정하고자 한다.
쿠바에 이미 많은 투자를 한 미국이 방관하지 않자, 미국∙스페인간의 전쟁 시작됨.
마닐라만에서 스페인이 대패하자, 쿠바를 독립시키고, 푸에르토리코, 괌과 필리핀을 미국에 할양하게 된다.
이에 스페인의 국력은 급속도로 쇠잔하게 되었다.

□ 제1차 세계대전 (1914∼1918) :
독일의 선전 포고에 따라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이 발발하였으나 4년만에 항복한다.

□ 세계 경제 공황 (1922∼1933) :
1922년 미국의 경제 공황은 급기야 유럽까지 파급되어 세계 경제 공황 사태를 맞는다.

□ 스페인 내란 (1935∼1939) :
부르봉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내전이 시작되어, 1939년에 프랑코 장군이 정권을 장악, 종결될 때까지, 8년간의 내전으로 인해 국력을 소진하여 경제는 파탄 위기에 몰린다.

□ 제2차 세계대전 (1939∼1945) :
독일, 이태리 및 일본이 주축국이 되어 전 세계를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다.
독일과 이태리 지원으로 정권을 장악한 프랑코총통의 파시즘 정권은 명목상으로는 중립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독일과 이태리를 지원하므로서 전후에는 UN가입이 거부되어 국제적으로 고립된다.
독일 스프루스재도 금수 조치 되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유보 상태에 있었다.
라미레즈3세가 기타의 전판재로 시더를 사용하게된 사유가 여기서 비롯된다.
미∙쏘 냉전이 격화됨에 따라 미국과의 관계가 깊어지자, 1953년에 미군기지가 설치됨.
이에 따라 1955년에 유엔에 가입되면서부터 우방 국가와 교류가 시작된다.
1960년대부터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기타 제작계도 중흥기가 온다.



[참고] : 먼저 알아 두어야 할 얘기가 있다.
기타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 중에도 라미레즈 악기에 대해서는 극찬에서부터 혹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이 사실이다. 장사속으로 Estudio를 많이 만든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얘기가 잠시 빗나가지만,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의 각종 기타의 연간 총출하량이 4만대쯤 된다고 들었다.
- 중저가의 클래식기타는 각종 기타의 연간 출하량의 1/20이라고 가정할 경우, 중저가의 클래식기타는 2천대가량 된다.
- 300호급 이상의 수제클래식기타를 연간 400대로 어림잡으면 이는 중저가 기타의 1/5정도가 된다.
- 정리 해보면, 300호급 수제기타는 각종기타의 총출하량의 1%밖에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건 정확성도 없고 통계 자료조차 없는 얘기이지만, 저가의 기타가 고가의 기타보다는 훨씬 많이 소요된다는 짐작은 가능하겠다. 개인 생각이지만, 어느 나라나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얼마 전에 스페인제 유명악기로 연주하는 세계적인 연주가의 명단을 훑어보았더니, 스페인출신 연주가가 그리 많지 않은걸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명기급 악기는 대부분 외국인이 소장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3-2. Tablao Guitar 시대(19세기 후반부터) :
식민지의 상실, 전쟁, 내란 등의 역경 속에서 장기간 동안 쇠락에 쇠락을 거듭한 스페인의 시대상이야말로 나락의 암흑기였다고 볼 수 있다.
시대적 변천사와 대조해보면 위에 열거된 기타 제작가들은 거의 스페인의 암흑기에 활동한 것을 알 수 있다.
중산층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그 시대에는 빈부의 차이가 컸다. 노동자나 농민들은 부지런한데 반하여, 도시의 중산층들은 게을렀다.
도시인들은 지주, 귀족과 군벌 등 지배계층이 누렸던 지난날의 습관을 이어 받는다.
점심과 시아스타(낮잠)로 3∼4시간씩 시간을 허비하고는, 한밤중까지 극장, 식당과 카페에서 지내는 등, 업무에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낙천적이고 다혈질인데다 낭만적 기질이 있는 스페인 사람들의 사회적 풍조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네들은 노래와 기타를 즐겼다는 얘기는 역사에도 나와 있다.
스페인의 제작가들은 대개 고가와 저가의 기타 2종류를 만들었는데, 대중들이 선호하는 악기는 저가형이 더 많았다.
전술한바와 같이 몇 백년에 걸친 외우내환을 겪어오다보니 서민들은 좋은 기타를 갖고 싶어도 살만한 돈이 없었다.
하물며 플라멩코로 생계를 유지하는 집시악사들의 형편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기타가 바로 “Tablao"이다.
Tablao는 살롱 같은 작은 스테이지에서 연주하기 알맞은 가볍고 두께가 얇은 기타이다.
토레스의 영향으로 전판은 점차로 커젔으나, 측판의 폭이 얇아서 안고 연주하기에 편리하다.
당연히 플라멩코 기타의 전신으로 값싼 재료를 사용한다는 게 특징이다.



3-3. 호세 라미레즈 1세(1858∼1923) :
마드리드에서 태어난 Jose Ramirez 1세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Francisco Gonzalez
공방에서 제작을 배운다. 그 시절에는 어릴 때부터 공방에서 잔일을 도우며 기타제작을 배우는게 관행이었다.
곤잘레스도 명장으로 그의 악기는 지금도 Paris Conservatory에 소장되어 있다.
1882년경에 라미레즈1세도 마드리드에 공방을 차렸고, 1890년에는 제자를 양성하는 학교(작업실)도 병설하였다.
제자는 그의 동생인 Manuel Ramirez, 그의 장남 라미레즈2세, Francisco Simplicio, Enrique Garcia 와 Julian Gomez Ramirez인데 그는 훗날 프랑스 빠리로 이주한다.
마뉴엘 라미레즈와 라미레즈 2세가 작업반장이 될 무렵에 Antonio Viudes와 Rafael Casana가 합류한다.
얼마 후 Alfonso Benito와 Antonio Gomez도 제작을 배우러 들어왔다.

1987년 라미레즈1세는 지역전시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한데 이어 다른 전시회에서도 여러번 수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페인은 넓은 나라인데다 지방색이 짙고 악기의 성향도 다른 까닭에 악기전시회도 마드리드나 세비야에서 따로 개최하는 게 관례였다.
라미레즈1세는 1882년경에 공방을 개설하였으므로, 그는 미국, 스페인간의 전쟁과 제1차 세계전을 겪은 셈이다.
스페인으로서는 해외의 식민지를 거의 모두 상실한 쇠퇴기의 시작라고 보면 되겠다.
19세기말에는 지금처럼 클래식기타보다는 플라멩코 기타를 찾는 사람이 더 많았었다.
20세기 중반까지도 플라멩코가 더 잘 알려져 있었고, 작은 모임에서 자주 연주되었다.
그런 장소에서는 작고 가벼운 기타가 적당한 까닭이다.
한 예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거장 토레스가 만든 플라멩코 기타도 작고 가볍다.

20세기 초부터 플라멩코 기타가 음량의 한계에 부딪치기 시작한다.
늘어난 청중을 위해 살롱의 규모가 커지면서 기존 플라멩코의 약점이 드러난 것이다.
극장에서의 연주는 더 심각하였으니, 5대의 플라멩코 그룹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는 당시 가장 우수한 제작가인 라미레즈1세로 하여금 큰 몸통의 Tablao의 고안을 유발하였다.
전면은 토레스 악기보다 더 넓으면서 측판의 깊이는 얕은 형태였는데, 잠정적으로는 이런 방식이 해결책이 되기도 하였다.
덩치 큰 Tablao의 성공으로 라미레즈 1세는 큰돈을 만지게 된다.
그는 기타제작의 Maestro로 명성을 날리며 라미레스왕국의 초석을 굳건히 한다.
그러나 동생인 마뉴엘 라미레즈와는 달리, 완고한 라미레즈 1세는 만년까지도 한때 성공하였던 그의 Tablao를 고집하였다. 물론 그를 지지하는 제작가도 많았다.
타레가(1852∼1909)는 토레스 뿐아니라 라미레즈 1세의 기타도 사용하였으며 어거스틴 바리오스 망고레도 그의 악기로 연주하였다.
그러나 그는 Tablao를 훨씬 더 많이 제작하였고, 이런 저가품 기타에는 라벨조차 붙이지 않았다.



3-4. 마뉴엘 라미레즈 (1864∼1916) : (1869∼1920)설은 오류임.
마뉴엘은 호세 라미레즈가의 직계는 아니지만 여기서 빼놓을 수 없다.

-  巨匠을 알아본 名匠 라미레즈 :
세기의 거장 Andres Segovia의 연주생애는 70여년이나 된다.
그중 세고비아가 세계적인 연주가로 발돋음 하는데 기여한 첫 악기가 마뉴엘 라미레즈라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쉬고 있다.
1912년작 마뉴엘 라미레즈는 산토스 에르난데스가 라미레스 공방에서 작업반장으로 일하던 시절에 만든 11현 기타였다.
당시 유명한 맹인 기타리스트 Gimenez Manjon의 주문을 받아 만든 기타였는데 그는 1876년작 토레스의 11현기타를 소장하고 있었다.
그가 값을 깎으려고 당치않은 흠을 잡는 바람에 성깔 있는 에르난데즈가 내주지 않아 진열장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산토스는 전판과 브릿지를 교체하고, 네크도 6현용으로 좁히고, 헤드 윗면에는 11개의 구멍을 가리기 위해 덧판을 붙였다.
그래서 이 기타의 머리 뒷면에는 줄감개 구멍을 메운 자국과, 내부에는 11현용 네크의 큼직한 앞지주가 그대로 남아있다.

1916년 안드레스 세고비아가 23살 나던 해 라미레즈 공방을 찾아왔다.
그는 마드리드의 아테네오 극장에서 데뷔 연주회에 사용할만한 좋은 기타를 빌려달라고 하였다.
라미레즈는 제작반장인 산토스 에르난데즈에게 진열장에 결려있는 11현 기타를 개조해보라고 시켰다.
세고비아가 공방을 찾아와서 그 개조된 악기로 시연할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저음이 깊고도 달콤하였고, 고음은 투명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떨림이 있었다.
나는 무아지경에 빠져서 그동안 배운 모든 곡을 오랜 시간에 걸쳐서 연주하였다.
나 자신이 둘로 나뉘어져 하나는 이 놀라운 악기를 연주하는 기쁨, 다른 하나는 그 음악을 듣는 이의 느낌을 즐기고 있었다.’
세고비아의 연주에 감동한 라미레즈가 ;
“야, 그 기타 가져가!”
세고비아가 대답하기를 ;
예? 저 기타 살돈이 없어요“
마뉴엘은 ;
“그러면 돈 대신 다른 것으로 갚아”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당대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연주한 그 악기는 마뉴엘 라미레즈를 일약 세계 최고의 명장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제작의 명장 마뉴엘 라미레즈는 연주의 거장 안드레스 세고비아를 첫눈에 알아본 것이다.


- 마뉴엘 라미레즈의 일화 :
토레스의 사후 얼마 안되어서 마뉴엘 라미레즈에게 우연히 토레스 기타의 라벨이 입수되었다.
마뉴엘 라미레즈는 최선을 다하여 토레스기타의 짝퉁 2대를 만들었다.
기타의 안쪽에는 먼저 자신의 라벨을 붙인 다음, 그 위에다 토레스의 라벨을 살짝 붙여 두었다.
마뉴엘은 토레스의 악기 2대를 새로 구하였으니 시연해보라고 연주가들을 초대 하였다.
두 악기를 연주해본 연주가들은, 지금까지 본 토레스 기타 중에 가장 우수한 악기라고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마뉴엘은 나중에 뒷말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 두 악기의 성능에 대한 의견을 자세히 수렴하고 다짐을 받았다.
마뉴엘이 두 기타의 안쪽에 붙어있던 토레스의 라벨을 뜯어내니, 마뉴엘의 라벨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Manuel Ramirez는 Jose Ramirez 1세의 친동생으로 일찌감치 형의 문하에서 기타제작을 배웠는데, 그중에서 가장 탁월한 재능이 돋보였다고 한다.
6살 아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중 유럽을 휩쓴 독감으로 52세의 젊은 나이로 형보다 7년이나 먼저 사망한다.
마뉴엘은 1891년에 빠리로 진출코자 하여, 형으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으나 프랑스의 내란 등으로 인하여 취소하고 같은 마드리드에서 공방을 개설한다.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만나지 않은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타고난 창의력과 추진력의 소유자인 마뉴엘 라미레즈는 독립하자, 그는 형인 라미레즈1세가 즐겨 만드는 Tablao와는 달리 새로운 기준에 의한 디자인으로 플라멩코 기타를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그의 이상적인 모델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채 플라멩코 기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마뉴엘은 클래식 기타의 연구 개발에도 정열을 쏟아 붓는다.
드디어, 마뉴엘은 1893년 국제적 악기 품평회인 미국의 시카고 악기 전시회에서 메달을 딴다.
마뉴엘은 기타의 연구와 제작에만 매달리지 않고 바이올린의 수리와 제작에도 깊은 관심을 갖는다.

- 그는 마드리드의 Royal Conservatory로부터 현악기 제작가로 인증 받는다.
- 나아가, Madrid Royal Chapel로부터 스트라디바리 4중주용 현악기 수리의 책임자로 임명 받기도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Santos Hernandez, Domingo Esteso, Modesto Borreuero 등의 명장을 배출하였다.
훗날 줄리안 브림도 마뉴엘의 악기로 연주하였다.
마뉴엘은 자식이 없으므로 그의 사후에는 실제 제작자의 이니셜을 악기에 명기하는 조건으로 [VIUDA DE MANUEL RAMIREZ-마뉴엘의 부인]이라는 기타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3-5. 호세 라미레즈 2세(1885∼1957) :
라미레즈 1세는 네 아들을 두었으나 장남인 라미레즈 2세를 제외한 세 아들은 다른 직업에 종사하였다.
라미레즈 2세는 알아주는 기타 연주가였다.
그는 1904년부터 2년간에 걸처 민속음악단의 일원으로 중남미의 여러 나라를 순회 연주 하던 중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정착한다.
거기서 낳은 아들이 라미레즈 3세이다.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기타를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가 1919년에 세비아에서 개최된 범 라틴국가 박람회에서 최고금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1923년 라미레즈 1세가 세상을 떠난 2년 뒤, 40세에 귀국하여 가업을 잇게 된다.
당시 Alfonso Benito와 Antinio Gomez가 작업반장이었고, Jesus Martinez가 도장을 맡았다.
Marcelo Barbero는(수습생)로 있었는데, 머지않아 독립하여 명장으로 이름을 날린다.

작업반장들을 열거하는 이유는 이 사람들이 훗날 유명한 제작가가 되므로 명기급 소장자들은 참고하시라고...
라미레즈 2세는 제1차 세계대전, 세계 경제 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골고루 겪었다.
특히 스페인 내란 때 마드리드에서 공방을 운영한 탓으로, 외우 내환으로 인하여 악기재료와 각종 기자재를 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악기의 수요도 감소되어 작업반장도 줄여서 홀로 작업하다시피 한 적도 있다.

그의 기타를 소장한 연주가는 Barrios Mangore, Carlos Montoya, Miguel Llobet, 등이다.


[참고] 헤드의 모양 :라미레즈 2세의 기타도 헤드의 모양은 라미레즈 1세의 헤드와 비슷한데, 이는 가업전승의 상징이라 봐야겠다.
라미레즈 1세 기타의 헤드는 프랜시스코 곤잘레스의 헤드와 똑같은바, 이는 스승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헤르만 하우저가의 헤드모양은 1,2세와 3세 모두 토레스의 헤드와 거의 같다.
이는 하우저 1세가 처음에 토레스를 깊이 연구하여 자신의 모델을 고안 하였으므로 토레스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걸로 유추할 수 있다.



3-6. 호세 라미레즈 3세(1922∼1995) : 
Jose Ramirez 3세야말로 라미레즈 왕국을 굳건하게 건설한 장본인이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3살 때 아버지를 따라 마드리드로 돌아왔다.
18세인 1949년부터 가업인 기타제작에 합류한다.
아버지는 다른 도제들과 마찬가지로 가차 없이 제작을 배우도록 하였고, 엄격하게 기준 디자인대로만 제작하도록 감독하였다.

그는 1957년 라미레즈 2세의 사망 후 가업을 계승하게 된다.
기타의 성능개발이 이미 완성된 것도 아니고, 오케스트라나 다른 악기 앞에서는 맥도 못 추는 처지에 기타의 형태가 그대로 머무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미레즈 3세 당시에는 기타음향에 관한 충분한 자료가 없으므로 관련분야에 지식이 있는 과학자들과 함께 발현음을 증폭시킬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로 한다.
- 그는 전판의 대체 재료로 레드시더(Thuja Plicata)를 선정하였다.
- 여러 가지 바니쉬의 진동전달과 Crystallization을 비교 분석한다.
- 타현 및 공명통으로서의 측판의 기능과 효율.
- 맑은 음질의 발현에 적합한 현장과 공명통 크기의 상관관계.
- 사용할 목재의 건조를 위한 재래식 방법 외에 자외선의 사용 등.갈 길은 아직도 멀었지만, 그는 세고비아가 1937년 이래 독일제 기타만 연주하는 것에 무척 마음이 상했다.
라미레즈3세도 그동안 몇 번 악기를 가져갔으나 콘서트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드디어 1960년에 세고비아가 그의 악기로 콘서트를 하는 날이 찾아왔다.
그 때부터 세고비아와 40년에 걸친 오랜 교분이 시작된다.
세고비아가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라미레즈 기타는 거의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참고] : 라미레즈3세의 수상 내용 :
- 1962년 시카고에서 기타협회 주최 전시회에서 금메달 수상.
- 마드리드 상공회의소로부터 동메달(전 기업을 대상으로 하므로 큰 상임).
- 1968년 로마의 Centro Culturale Chitarra의 명예의 전당에 들어감.
- 1972년 마드리드에서 명장에 선정되어 금상 수상.
- 1983년 Santiago de compostela에서 명예 작곡가상 수상
- 1986년 인간문화재로 지명됨- 1987년 마드리드 상공회의소로부터 왕조 100주년 기념 포상.
- 1987년 빠리의 문화교육성으로부터 금제 소리굽쇠 수상.

- 무엇보다도 소중한 상은 세고비아가 타계하기 수개월 전에 라미레즈 3세에 관해서 쓴 짧은 헌정사이다.

『 A FEW WORD ABOUT JOSE RAMIREZ :
호세 라미레즈 3세는 훌륭한 기타 제작가일뿐만 아니라 기타의 발전사에 기여한 지칠 줄 모르는 연구가이다.
그는 찰현 및 탄현악기의 신비한 진동파와 음질을 연구하였다.
그는 아주 소수의 현악기 제작가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 그 이상의 방대한 지식을 소유하였다.
그는 그러한 지식을 끊임없이 실질적인 작업에 적용하므로서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라미레즈는 그를 돕는 탁월한 제작기술자들의 협력을 받아 창조적인 솜씨로 기타 제작의 지도와 감독, 개선과 수정 작업을 하므로서 날이 갈수록 성능을 향상시켜 왔다.  
나는, 지금까지 20대가 넘는 그의 기타로, 녹음실 뿐아니라, 청중이 3,000명, 4,000명, 때로는 5,000명도 넘는 콘서트 공연장에서 나홀로 라미레즈가 흘린 땀의 열매를 맛보았다.
일례로, 미국 디트로이트 근교의 Ann Arbour 공연장에서는 청중 5,000명이 넘는데도 마이크를 사용치 않고 연주하였는데, 그 이유는 예술보다 상업적인 면에 비중을 두는 이즘 젊은이들이 이용하는 확성기를 반기지 않는 까닭이다.
전 생애를 걸고 목표의 실현을 추구하는 강한 집념으로, 호세 라미레즈 3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색으로 울려퍼지는 기타를 만들어 낸 것이다』

Andrez SegoviaMaraquis of Salobrena  


세고비아는 연주 여행에 기타를 한 대만 갖고 다니는데, 너무나 잦은 연주를 하다보면 악기가 고장이 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라미레즈는 이에 대비해서 늘 기타를 포장해두었다가 보내주곤 하였다.
한번은 미국에서 연주 중에 악기가 고장났는데 보내줄 시간이 모자랐다.
하는 수없이 가까이 있던 어거스틴 기타줄 회사(듀퐁) 사장부인이 소장하고있던 라미레즈 2세 악기를 보냈다고 한다.
그는 세고비아가 지적한 바와 같이 문제의 여린 음정과 울프노트를 해결하고자 노력을 경주하였다.
거트현 시대가 저물며 1940∼1950년대에는 나일론 현이 범용화 되기 시작한다.
나일론 현의 효능을 극대화하여 오늘날과 같이 힘차고 아름다운 소리를 발현할 수 있도록 이에 적합하게 악기의 성능을 개선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 1950년대에 들어서서 그는 연구실에서 실험한 결과 얇은 측판으로는 발현 효과가 미진함을 발견하였다.
먼저 측판의 변형을 방지하므로서 내부응력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안쪽에 라이닝을 한 이중측판을 고안하였다.
- 몸통내 공기의 진동을 더욱 활력 있게 하기 위해서는 현장을 664mm로 늘리는 게 최선임을 깨달았다.
이는 3프렛에서 1.5mm정도 프렛간격이 커지는 만큼 운지의 어려움은 있겠으나 실보다는 득이 더 크다는 판단이 섰다.
- 라미레즈의 영향으로 60∼70년대에는 전 세계에 현장 664mm 악기가 유행하게 된다.
심지어 일반현장인 650mm의 기타는 잘 안팔릴 정도 였다.
- 네크도 습기에 의한 변형을 방지하기 위해 안쪽에 흑단 심을 심었다.
네크의 두께와 폭은 누가 뭐래도 세고비아의 힘 있고 큰 손을 기준으로 삼았다.
- 전통적으로 악기에 입히던 쉘락이 습기로 인한 변형에 취약함을 고려하면, 오히려 두터운 락커가 전판의 횡적진동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락커 마감을 개발한다.
[De Camara Model]의 경우, 측판의 중간을 따라서 얇은 날개를 부착하므로서 울프 노트를 방지하도록 개발된 것이다.



3-7. 기타의 다량생산 시대 :
전에 라미레즈 1세와 2세도 물론 저가형의 기타를 만들었지만 규모는 달랐다.
당시의 저가형은 출고할 때 라벨조차 붙이지 않았다.
실제로 세계적인 명기를 내놓은 사람도, 다량 생산방식으로 중고가의 표준악기 제작을 시작하고 관리한 사람도 다름 아닌 라미레즈 3세로 봐야 된다.
라미레즈의 부친인 라미레즈2세 시대에는 전쟁과 내란으로 인하여 악기 재료를 구하기 힘들 뿐아니라, 악기를 찾는 사람도 적어서 작업반장이 2명밖에 없었다.
1954년 기타의 제작보다 관리에 능력이 있어 가업을 헌신적으로 돕던 세살 아래 동생이 의료사고로 타계한다.
라미레드2세도 1957년 타계할 때까지 거의 3년간을 중환으로 누워있었다.
라미리즈3세는 1940년 공방에 합류한 이래 정신없이 제작과 나름대로의 개발에 몰두하다보니 17년이나 지나서 뒤늦게 장인(Maestro)의 칭호를 획득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기타용 재료의 수급이 원활해지기 시작한다.
패전국이었던 독일, 이태리와 일본도 어느새 전후재건을 이루고 세계의 산업경제가 급속도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라미레즈 3세의 술회에 의하면, 스페인의 많은 사람들이 서민들의 형편에 맞는 저가 내지 중고가의 라미레즈 악기를 갖기를 원하는 시대가 왔다.
백화점에는 독일제나 일제 등의 수입기타가 진열되기 시작하였다. 라미레즈도 상공부로부터 종용을 받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라미레즈3세는 대량생산체계가 아닌 다량생산체계를 갖추게 된다.
그는 중고가의 기타를 다량으로 제작하기로 하고 [GUITRRA DE ESTUDIO]라는 라벨을 처음으로 붙이게 된다.
비록 오래 전에는 라벨이 없는 악기를 출고하기도 했으나, 출고된 악기의 A/S등의 사후관리를 위해 법적으로 요구된 절차이다.
기타를 개인이 혼자 제작하면 1년에 30대 정도는 만들 수 있다.
대비 해보면, 라미레즈3세가 제작한 수량은 1년에 1,200대 정도로 기록되어있다.
이를 위해 6명의 출중한 작업반장을 엄선하였고, 그 수하에 도제들을 두어 철저히 라미레즈3세의 디자인대로만 제작하도록 작업을 감독하고 관리하였다.
이로부터 배출된 사람들이 거의 모두 당대에 유명한 명장이 된다.


[참고] :
당시 스페인에서는 기타 제작가를 3개의 카테고리로 구분함
Maestro : 장인 - 장인 조합에서 시험에 합격하거나, 전시회에서 입상한 사람.
Journyman : 작업반장(책임기술자) - 기타 제작 경험이 많은, 장인문하의 숙련공.
Apprentice : 도제(실습생) - 목공 내지 제작경험이 있는 사람 중에서 선발함.

※ 라미레즈3세의 문하생들 : 알파벳순(작업반장과 도제 포함)
Manuel Alfonso Gimenez • Cayetano Alvarez Luna • Paulino Bernabe almendariz
• Jose Luis Alvarez Mariblanca • Carlos Blanco Pena • Manuel Borrguero Marcos
• manuel Cacerez Pizarro • Alfonso Contreras Valbuena • Pedro Contreras Valbuena
• Jose Flores Duro • Juan Garcia Rey • Manuel Gonzales Contreras
• Juan Miguel Guardiola Moreno • Pedro Gimenes Posadas • Jose Lopez Cubillo
• Carmelo Llerena Martinez • Miguel Malo Martinez • Felix Manzanero Cabrera
• Pedro Manzanero Cabrena • Ignacio Manzano Rozas • Antonio Martinez Ortega
• Julian Moraga Rodriguez • Fernando Morquende De Cruz • Ramon Penalver soler
• Tedoro Perez Mariblanca • Manuel Rodrguez Fernandez • Jose Romero Garrido
• Artuso Sanzano Moreno • Mariano Tezanos Castro • Mariano Tezanos Martin

자신의 악기가 어느 계열의 제작가인지 흥미삼아 찾아보시기 바람.
※ 라미레즈 3세의 기타 소장 연주가 :
세고비아에게는 20대가 넘는 악기가 오고갔다.
그 중에는 세고비아가 줄곧 3년간이나 연주회에 사용한 기타도 있다.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라미레즈3세의 기타의 음질향상에 기여하였다.
시더기타도 세고비아가 연주함으로 인해 세계도처의 제작가들이 만들게 되었다.

세고비아를 위시해서 당대의 수많은 연주가들이 라미레즈3세의 악기를 찾았다.

• Laurindo Almeida(Cedar) •  Ernesto Bitetti • Pietro Bonagiuri(1969) • Liona Boyd • Oscar Ghiglia • William Kanengiser • Alexandre Lagoya • Vladimir Mikulka • Santiago Navasquez • Douglas Niedt, • Christopher Parkening(1966,1967-Cedar), (1962,1964,1973-Spruce) • David Russell • Andres Segovia(1960,1963-Spruce), 1967,1985-Cedar) • Goran Sollscher • Jose Tomas(8-String) • Gallina Vale • Alirio Diaz • Narcisco Yepes(10-String) • Virginia Luque(1963-Flamenco) • Santiago Navasquez • Douglas Niedt • Scott Tennant • Jose Tomas • Kazuhito Yamashita,
라미레즈 3세의 기타는 너무나 유명하여져서 연주가에게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 대리점이 생겼고 기타 애호가의 선망의 수집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3-8) 호세 라미레즈 4세와 아말리아 :  
라미레즈4세는 1953년에 태어났다.
그는 1977년에 명장의 칭호를 받게되며 세고비아도 그의 악기를 연주에 사용하였다.
세고비아가 사용하던 4세의 기타는 $50,000에 수집가에게 팔린 기록이 있다.  

1995년에 타계한 라메레즈 3세의 생존 시인 1988년에 라미레즈 4세와 누이 아말리아가 사업을 승계 받게 된다.
아말리아도 라미레즈3세 문하에서 기타 제작기술을 전수 받았다.  

라미레즈 3세 때는 연간 120대를 제작하였는데,

1990년대에 라미레즈4세가 제작규모를 연간 1,000대로 확장하면서 다양한 수준의 기타를 만들기 시작한다.

한편 배급처를 잘못 선택함에 따라 악기의 품질이나 성능과 관계없이 흔해빠진 악기가 되자,
유명 연주가들이 라미레즈기타를 내려놓는 바람에 일순 평가절하 되고 만다.  

라미레즈3세의 유시에 따라 현재의 규모와 같은 연산 120대의 규모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스페인의 사회노동법 때문에 규모를 줄이는게 불가능하였다.
몇년이 걸려서 해결한 방법이 지금과 같은 전문 하청제도이다.

불행히 라메레즈4세는 2000년 6월에 사고로 타계하고 아말리아가 사업을 책임지게 된다.  
1960년대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했던 현장664mm의 명기 1a를 라미레즈4세는 현장을 650mm로 줄여서 Traditional과 Especial model로 개량하였다.
이 악기들은 예전 라미레즈3세의 1a와 비교해 손색이 없어 보이는바 판매가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라미레즈 공방에서는 아말리아의 직간접 감독아래 연주용 기타만 만들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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